“여보게 자네, 이런 기모찌 알겠나?”
“월급쟁이가 월급을 받았네. 받은 즉시 나와서 먹고 사고 쓰고, 실컷 마음대로 돈을 썼네. 막상 집으로 돌아가는 길일세. 지갑 속에 돈이 몇 푼 안 남아있는 것은 분명해. 그렇지만 지갑은 못 열어봐. 열어보기 전에는 혹은 아직은 꽤 많이 남아 있겠거니 하는 요행심도 붙일 수 있겠지만 급기야 열어보면 몇 푼 안 남은 게 사실로 나타나지 않겠나? 그게 무서워서 아직 있거니, 스스로 속이네 그려.
쌀도 사야지. 나무도 사야지. 열어보면 그걸 살 돈이 없는 게 사실로 나타날 테란 말이지. 그래서 할 수 있는 대로 지갑에서 손을 멀리하고 제 집으로 돌아오네. 그 기모찌 알겠나?”

1992년 7월 2일, 캐나다 연방정부는 뉴펀들랜드 연안의 대구 어업을 전면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모라토리엄. 유예가 아니라 금지였다. 당일 4만 명이 직업을 잃었다. 갑자기 벌어진 일이었지만 아주 갑자기는 아니었다. 과학자들의 경고가 1980년대 중반부터 있어 왔기 때문이다. 개체수가 임계점을 향해 떨어지고 있다고. 정부는 들었지만 쿼타를 낮추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어부들의 표가 있었고, 어업회사의 로비가 있었고, 수치가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열어서 확인해야 할 지갑에서 손을 멀리한 채로 1992년이 되었다.
대구는 말 그대로 뉴펀들랜드의 모든 것이었다. 현금이었고 인프라였고 문화였고 끼니였다. 대구가 없으면 뉴펀들랜드에는 교환할 것이 없었다. 아마도 아예 유럽인들이 정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수백 년간 뉴펀들랜드 사람들은 도리를 타고 나가 핸드라인으로 대구를 잡았다. 손낚시는 이래저래 한 가족을 먹여살릴 수 있는 양이었고, 바다가 감당할 수 있는 양이었다. 20세기 중반 이후 유럽의 대형 저인망 어선들이 그랜드뱅크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 척이 일주일 만에 수천 톤을 퍼냈다. 캐나다 정부는 1977년 배타적 경제수역을 200해리로 선포하며 이를 막으려 했지만, 그 이후로는 캐나다 자국 어선들도 같은 방식으로 조업했다.
어획량은 늘어났다. 대구 수는 줄어들었다.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 사이.
한 사람이 태어나서 만나는 모든 사람이 어부였던 세상.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부터 내 자식들도 당연히 어부가 될 세상을 수백 년간 살아온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어부가 하지 않을 일을 배워야 했다. 바다 위 파도의 모양, 고기가 모이는 포인트, 그물 엮는 방법,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것들이 하루아침에 쓸모없는 지식이 되었다. 연방정부는 TAGS라는 지원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어부들에게 생계비를 지급하고 직업 훈련을 제공한다는 계획이었다. 프로그램은 예정보다 일찍 종료됐고, 많은 어부들은 재훈련 없이 지원이 끊겼다.
대구가 빠져나간 자리는 스노우 크랩이 채웠다. 한 어부의 말에 따르면, 대구가 줄어들면 게가 잡히고 게가 줄어들면 대구가 다시 보인다고 한다. 바닥에 사는 것들끼리의 일이다. 어부가 빠져나간 자리는 채워지지 못했다. 사람들은 떠났고 아이들이 자라면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정책이 강제한 것이 아니었다. 삶이 유지되지 않으면서 스스로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어떤 마을은 이름만 지도에 남았다.
어업은 쿼타로 관리된다. 쿼타는 사고팔 수 있다. 어종에 따라 주식처럼 오르락내리락한다. 20여 년 전에 1달러에 거래되던 게 쿼타가 지금은 백만 달러 단위에 거래된다. 쿼타를 많이 보유한 사람은 바다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 남에게 빌려주고 수익을 가져가면 그만이다. 암체어 피셔맨. 실제로 배를 타려는 사람은 보트, 라이센스, 어구, 쿼타를 모두 갖춰야 한다. 돈을 빌려주는 곳이 그 암체어 피셔맨이나 어업회사인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대구는 소중하지만 잡을 수 없는 생선이다. 짧은 여름 주말에만 허용된 낚시. 하루에 다섯 마리. 그게 전부다. 뉴펀들랜드 사람들은 그걸 레크리에이셔널 피셔리라고 부르지 않는다. 먹기 위한 낚시 - 푸드 피셔리라고 부른다.